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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미논술CLASS[#논술언니]/논구술면접&시사상식_Archive

[논술언니 지식쿠키] 주제 22: 정약용의 ‘수오재기’와 사르트르의 ‘존재’

 

안녕하세요
대치동 논술언니 조경미쌤입니다^^
 

 
올해는 우리 수험생들의
배경지식 확장에 도움을 드리고자
읽기자료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대신 너무 힘들지 않게,
논술과 면접에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쿠키’ 하나 먹듯이 가볍게 읽고,
꼭꼭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도록
알려드릴 거예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
당신들의 합격에 기여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해볼게요^^

 


 
최근 논술 주제로 자주 다루어지는 제시문 중에 건국대, 서강대, 서울여대, 성균관대, 세종대, 이화여대 등에서 최근 2~3년 사이에 나온 글들을 한번 소개해볼까 합니다.
 
고등학교 독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다산 정약용의 “수오재기(守吾齋記)”입니다. 한자어를 풀어 보면, 지킬(수) 나(오) 집(재) 기록할(기), 즉 ‘나를 지키는 집에 대한 기문’인데요, 정약용의 큰형님인 정약현의 수오재에 쓴 기문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 익숙한 작품일 거예요.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을 뽑아 갈 수 있겠는가? 나무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다. …(중략)… 그러나 유독 이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며 출입이 무상하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혹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으로 겁을 주면 떠나가며, 질탕한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미인의 예쁜 얼굴과 요염한 자태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 중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가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나를 지켜라’는 조언을 담고 있는 글로, ‘나’라는 존재는 부귀영화나 유혹, 위협 등으로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으니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성찰을 통해 ‘진정한 나’를 보존하고 내면의 정신을 지켜내라는 조언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 같은 옳은 가치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소수자를 동등하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등장했다면, 위의 제시문을 기반으로 옳지 않은 상황에서 부정의를 눈감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신념을 지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논의할 수 있을 거예요.
 
무신론자였던 사르트르는 인간은 사물과 달리 그 본질이나 목적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연필은 처음부터 ’쓴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연필의 본질이므로, 연필의 존재는 그 본질로부터 나온다. 즉 사물은 본질이 그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과 다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는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면서, 인간은 우연히 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의식‘의 유무를 기준으로 의식이 없는 ’사물 존재‘와 의식이 있는 ’인간 존재‘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사물 존재‘를 ’즉자 존재(Being in itself)’로 ‘인간 존재’를 ‘대자 존재(Being for itself)’로 각각 명명하였다. 여기서 즉자 존재는 일상의 사물들처럼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계속 그것인 상태로 남아 있다. 반면에 대자 존재는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여 스스로를 바라볼 수도 있고 매 순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타자와 연관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주체적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듯이 타자도 주체적 의식을 지니고 있어서, 내가 아무리 주체성을 지닌 존재라 하더라도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은 나를 즉자 존재처럼 객체화하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모습을 일컬어 ‘대타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렇게 자신이 타자의 시선에 노출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며 그것을 타자가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타자를 자신의 선택 속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타자의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계속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한편, 사르트르의 ‘존재’에 대한 견해도 자주 나왔어요. 사물을 의미하는 ‘즉자 존재’와 오직 사람만 될 수 있는 ‘대자 존재’, 그리고 사람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대타 존재’. 그럼 당연히 사람이 ‘즉자 존재’로 전락하는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게 되겠죠? 남에 의해 규정되는 ‘대타 존재’ 역시 개인의 능력을 깎아내리거나, 누군가를 비하하는 용도로 전락되는 상황이 야기되기도 하겠네요.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 주체를 지키기 위해, 남의 규정에 저항하고 나 스스로의 주체성을 세우는 게 참 어려운 일일 수 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온전히 ‘나’로 설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진정한 ‘대자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나조차도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온전히 ‘나’로 홀로서는 게 참 어려운 삶을 살고 있으면서 이런 얘기하기 참 민망합니다만..
수험생 당신들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려고 지금을 살아내고 있으니까 응원한다고요. 무엇이든 극복하고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흘릴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