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치동 논술언니 조경미쌤입니다.
올해는 우리 수험생들의
배경지식 확장에 도움을 드리고자
읽기자료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대신 너무 힘들지 않게,
논술과 면접에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쿠키’ 하나 먹듯이 가볍게 읽고,
꼭꼭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도록
알려드릴 거예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
당신들의 합격에 기여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해볼게요^^
‘공리주의’는 논술에 출제되는 꽤 빈출 주제 중 하나예요. 물론 면접 문제로도 자주 나오고, 사탐 교과에서도 주요 개념으로 꽤 자주 다루었을 겁니다. 다만 선택과목에 따라 익숙하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니 오늘 ‘공리주의’의 핵심 개념에 대해 간결하게 숙지하고 가도록 합시다.
혹시 ‘공리주의’를 영어로 뭐라 하는지 아세요? 우리 똑똑이들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utilitarianism’이라고 해요. 한자로는 ‘功利主義’이고요. 그럼, 어원을 좀 살펴볼까요? 왠지 ‘utility’에서 온 말 같죠? 맞아요! 공리주의는 그러니까 ‘유용성’과 관련된 개념이에요. 물론 어떤 학자들은 公利라고 번역하고 사용하기도 해요. ‘공공의 이익’이라는 뜻으로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통의 공리주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행복이나 쾌락을 기준으로 한 功利로 이해를 해보려 해요.
교과서에서도 인간의 경험에서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중요성, 그리고 공리주의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 윤리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이성과 사유의 측면을 중시하느냐, 감각과 경험의 측면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성과 사유를 중시하는 윤리는 그리스의 고전 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성적으로 추리할 수 있는 이상의 세계와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의 세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선과 정의의 실현은 이성에 따라 감각적 충동을 억제하고 덕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윤리는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로 이어지고, 근대에 대륙의 합리론을 거쳐 칸트의 윤리로 발전하였다.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윤리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헬레니즘 시대에 에피쿠로스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였는데, 삶의 목적 또한 쾌락과 행복의 실현에 두었다. 그런데 쾌락이란 사람 및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영국의 경험론과 공리주의를 거쳐 현대의 실용주의로 발전하였다.
<고등학교 교과서 「윤리와사상」, 교육인적자원부, 116쪽 발췌>
‘공리주의’의 한 가지 핵심은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사회 전체의 이익과 행복도 증진된다는 점이에요. 한 사람의 쾌락이 고통보다 크다면, 개인은 쾌의 상태에 있으니 행복하겠죠? 이렇게 행복한 개인이 많이 모이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겠죠? 그런데 한 사회에 속한 일부의 사람이 매우 많이 불행하다고 생각해볼게요. 그렇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히 행복하고, 어떤 극소수의 사람은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쾌락을 느낄 수도 있어요. 이때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의 불행의 총합이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행복의 총합보다 작다면, 사회 전체는 행복하다고 볼 수 있겠죠? 산술적으로. 그러면 이 사회는 행복한 거예요. 즉, 윤리적 판단 기준과는 무관하게, 불행보다 행복이 크거나 많고, 고통보다 쾌락이 크다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이론적 시각인 공리주의의 주요 특성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죠!
논술 문제에 출제될 때 나오는 개념을 조금 간단하게 정리해봤어요. 물론 질적 공리주의, 양적 공리주의,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밀의 ‘배부른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든지 공리주의와 관련된 개념과 논의가 더 많기는 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쿠키처럼 가볍게 읽고 꼭꼭 씹어 삼킬 거니까 여기까지만 이야기할게요. 대신 대학별고사에 잘 나오는 공리주의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중요, 다수>소수
② 쾌락, 행복>불쾌, 고통
③ 윤리적 판단이나 도덕적 동기보다는 결과적 이익과 행복이 더 중요함(쾌락이 항상 선은 아닐 수도 있고, 불쾌가 항상 악이 아닐 수 있음)
그래서 공리주의에 근거하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을 기꺼이 행할 수도 있어요. 내가 다수에 속하고 행복이 증진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내가 희생당해야 하는 소수이고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남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회에 속해있다면, 우리는 과연 공리주의에 근거한 판단과 행위를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옛날 언젠가 판타지 소설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적이 있어요. ‘만약 내가 오멜라스의 구성원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는데 왜 행동하기는 어렵지?’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지하실의 불쌍한 아이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당신들도 알고 있는 물음이에요. 그렇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요, 어쩌면 사회적 붕괴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결정하고 행위를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저는 이강백의 <파수꾼>과 더불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고, 당신들이 공리주의의 가치와 더불어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공공건물들 중 하나는 지하실 방이 있다. 아니 어느 널따란 개인 저택의 지하실일 수도 있다. 그 방에는 굳게 잠긴 문이 하나 있을 뿐 창문도 없다. 거미줄 쳐진 지하실 창문으로 비치는 한줄기 희미한 빛이 그 방 널빤지 벽의 갈라진 틈으로 먼지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들어올 뿐이다. 그 작은 방 한쪽 구석에는 덩어리지고 엉긴 채 딱딱하게 굳어 악취를 풍기는 대걸레 두 자루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녹슨 양동이 하나가 높여 있다. 바닥은 지저분하고 습기가 차 축축한 것이 여느 지하실 창고와 다를 바 없다. 가로로 두 걸음, 세로로 세 걸음 정도인 그 방은 청소 도구들을 넣어 두는 벽장이나 쓰지 않는 연장을 처박아 두는 창고에 불과하다. 그 방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앉아 있다. 남자 아이일 수도 있고 여자 아이일 수도 있다. 겉모습으로는 여섯 살쯤 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열 살쯤 되었다. 그 아이는 정신박약아이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공포와 영양실조, 그리고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중략)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여덟 살에서 열두 살 사이에, 상황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그 사실에 대해 설명을 듣게 된다. 지하실의 아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지만, 때로는 나이든 어른이 오기도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보려고 오는 이들도 꽤 있다. 아무리 설명을 그럴듯하게 들었다 해도 그 광경을 본 젊은 구경꾼들은 언제나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파한다. 자신들이 그 아이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것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동안 전해 들었던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직접 본 사람들은 화를 내고, 분노를 느끼며,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 비참한 아이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 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후략)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Ursula Kroeber Le Guin, 1973)
길어졌나요? 그렇지만 어렵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5분쯤, 잘 포장된 쿠키를 하나 집어 봉투를 뜯고 꼭꼭 씹어 그 맛을 음미하고 꿀꺽 삼킬 수 있는 여유를 오늘 여기에 투자해보세요. 분명히 당신들의 입시 생활 어딘가에 소소하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봅니다.
그럼, 사랑하는 당신들의 3월 새학기 시작을 응원합니다^^
이 글은 <울야기>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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