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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TORY

[포스코 아쿠아리움] 아쿠아리움에서 울다가 웃는다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서 울던 사람
나는 아쿠아리움에 갈 수 없는 운명인 줄 알았다.
인생에 딱 한 번, 처음으로, 오키나와에 있는 추라우미 수족관에 간 적이 있다. 일본에 있는 가장 큰 수족관이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수족관 중에 하나라고 해서 갔다가 고래상어도 제대로 못 보고 나왔다.
처음엔 바닷속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는 것처럼 경이로웠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름다웠고, 또 신비로웠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그러나 아쿠아리움 안은 춥거나 덥지도 않았고, 유치원 아이들 소풍이었는지 왁자지껄 경쾌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약간은 습하지만 덥지는 않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는 것아서 마치 바닷속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기도 했고.
그러다 위아래로 계속 헤엄을 치는 물고기에 눈이 갔다. 위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내려오고, 내 눈 앞을 지나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같은 궤도를 그리며 정형행동을 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고기에 눈이 갔다. 그러다 문득 수조 안쪽에 있는 물고기의 슬픔이 느껴져서 코끝이 따끔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뒤를 스쳐지나가는 아이들 무리와 갇혀 있는 물고기의 처지가 대조되어 그 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내가 아팠다.
물고기가 모두 고통을 느끼는지, 물고기가 인간에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는지, 인간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고통을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학자들마다 동물의 기억력이나 쾌고감수능력에 대해서는 다른 말들을 하니까.
그런데 누군가의 고통을 전시하는 이 공간에 내가 돈을 내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매우 미안하고 부끄러워졌으며, 어쨌든 입장료를 냈으니 끝까지 보고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두리번거림을 최소화하며 끝마무리를 짓고 나오기는 했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웠고,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실체 모를 고통을 한쪽 눈을 감고 모르는 척. 거기에 그 마음은 두고 나오려고 노력했다.
수족관에서 청승맞게 눈물 닦는 여자의 모습이라니.


 
생각해보니 그 전에도 나는 동물원에 갈 수 없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동물원을 너무 좋아했다. 10대 때 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동물원을 참 많이 갔더랬다. 동물을 좋아했고, 강아지를 좋아했고, 강아지와 기니피그를 키웠으니까. 내가 동물원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소도 좋아했고, 염소나 닭도 좋아했다. 심지어 나는 길가에서 본 생쥐에도 감동하고,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까마귀나 비둘기 하나에도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자주 가는 시골 할머니 댁에도, 우리 집에도 항상 다른 생명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동물원에서 갑자기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 접근성 좋은 곳에 있는 공원이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가면 행복한 마음이 아니라 아픈 마음이 더 커서. 한 곳에 앉아 멍하니 있는 원숭이들이 불쌍했고, 광활한 창공에서 날갯짓을 해야 하는 대형 조류들이 겨우 날개 전체를 펴는 것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며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물론 귀엽다, 짠하다, 아휴.. 하면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지만. 아니 어쩌면 마음이 단단해졌다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을 공감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찌든 사회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수족관이나 동물원을 갈 수 없는 마음과 몸이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동물원이나 수족관에 섣불리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동물권과 유기견, 더불어 돌고래 해방 운동 등등, 양심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있었다.


 
어느 날, 동생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동생은 동물 좋아하는 언니가 왔다고 해변에서 말을 탈 수 있는 곳에 데려갔다. 고마운 마음이지만, 언니는 그 말을 마음 편하게 탈 수가 없었다. 풍경이 아름답고 커다란 말이 멋있었지만 도저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를 태우고 마부가 이끄는 곳으로 왔다갔다 해야 하는 그 말의 수고로움에 대해 미안해서 언니는 저 말 못 탄단다..
그랬더니 동생이 말했다.
“언니가 저 말을 타줘야 저 녀석이 저녁에 맛있는 당근을 먹을 수 있지! 일하지 않은 말에게 주인이 밥 주겠냐? 쟤네가 돈을 벌어야 맛있는 당근과 각설탕을 먹을 수 있는 거지!!"
그것도 맞는 말인데, 일리는 있는데, 알겠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타면서 힘들게 해변을 걷게 하니까, 굳이 나는 그 말을 타지는 않으련다.
내 마음 편하자고.


 
그리고 시간이 좀 흘렀다. 나는 이제 바닷속 깊이 다이빙하여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생각보다 꽤 자유롭게 수심 10m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가끔 20m 지점까지도 내려가 바닷속 신기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이판 바닷속 20m 지점에서 돌 아래 바닥에 쉬고 있는 스팅레이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바다생명과 교감한 내 첫 정이었다.
스쿠버를 하면서는 더 편하게 바다 깊은 곳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기회를 얻었다. 내가 자연 안으로 들어가 행복을 얻는 순간이었다. 아닐라오 까떼드랄 포인트에서 셀수없는 물고기들에 둘러싸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십자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장면이 경이로워서 '경외감'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감정이 그러하다면, 당시에 나는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그때 보았던 물고기들 가운데 이름을 아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닷속 자연이 나를 품어준 그 사실 하나가 심장을 콩닥이게 했으니까.
 


 
아주 우연한 만남
어느 날 포스코빌딩에 아쿠아리움을 만났다. 처음엔 그저 신기했고,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지만, 적어도 3종류의 상어와 대왕범바리 한 마리, 블루탱, 아네모네, 옐로탱, 유니콘탱, 롱핀 배너피쉬, 옐로우백 푸실러, 트레발리 등등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유영할 수 있는 원통형 수조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그 넓지 않은 수조 속에도 각자의 서식 공간이 나누어져 있는지 물고기들은 항상 있던 곳에 있는 편이었고, 찾아갈 때마다 자주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그 앞에 한두 시간을 서 있어도 이상할 것 없이 마음이 평온해졌다. 물론 가끔은 눈물이 핑 돌 때도 있다. 블랙팁 리프 상어 하나는 좌측 가슴지느러미에 상처가 있어서 유영하는 모습이 좀 불편해 보인다. 그래도 매일 가서 보았을 때 잘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본다. 그래서 포스코빌딩 아쿠아리움은 내 ‘작은 어항’이 되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아쿠아리움에 하루에도 한두 번씩 다녀오고, 운동 다녀오면서도 다녀오고, 포스코빌딩은 운 좋게도 그 건물과 무관한 나에게도 열려 있었다. 매일 다이빙을 할 수 없는 여건에 살고 있는 나에게, 작은 수족관 앞의 시간은 힐링이고 치유의 순간이 되었다. 살닿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은 내게 말없는 말을 전해준다. 그래서 때때로 불안과 고통의 시간이 치유와 여유의 시간을 향해 흐른다. 기분이 힘차게 변화해야 할 때는 라벨의 ‘Bolero’를 반복재생해서 들으며 물고기들의 잔잔한 움직임을 본다. 그리고 때때로 생상스의 ‘Aquarium’을 반복재생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의 시공간에서 마주한다는 건 축복이고 소소하지만 너무 확실한 행복이니까.
 

왼쪽 지느러미가 아파, 그래도 뒤뚱뒤뚱 헤엄은 잘 치지..

 

대왕범바리와 옐로우백푸실러, 그리고 그밖의 물고기들
포스코 아쿠아리움 바닥 큰 조개껍데기에는 종종 상어가 쉬고 있다.

 
남은 이야기
그리고 서방님의 조언에 따라 코엑스 아쿠아리움 연간 입장권을 샀다. 12개월 간의 힐링을 위해 비교적 큰 돈을..ㅋㅋ
애 키우는 집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이런 연간을 산다는 게 조~금은 부끄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샀다는 게 너무 신나는 일이었다.
수조 안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어서 아쉬움에 한참을 서있다 오지만, 메인수조 앞 상어와 레이들을 보고 멍하게 있을 때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런 게 내게는 종교다.
 
사람은 변한다. 동물의 쾌고 감수에 큰 관심이 없던 내가 다른 생명의 고통에 과잉 이입하며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제는 수족관 관람객으로 동물들을 만나러 간다. ‘구경’하는 관람객이라기보다는 ‘교감’하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로 그들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 고맙다, 소중하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하다.
갇혀 있는 삶이 행복할리 없다는 이성의 외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받으며 생존할 수 있는 나름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는 감정의 끄덕임이 교차한다.
그래도 내가 조금은 관대해지고, 조금은 여유를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알게모르게 나도 성숙해가는 중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번주엔 또 언제 아쿠아리움에 가볼까.. 주말 강의 마치고 잠시 아쿠아리움에 다녀올 때면, 이렇게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말미가 아마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였던 것 같은데,
그걸 따라서, "진짜 행복은 수족관에 있다." 이러면서 산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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