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1일 출범 '기지촌 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 우순덕씨
12.08.26 18:26
최종 업데이트 12.08.26 18:26박소희(sost)
우순덕(61)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아래 햇살복지회) 원장은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 공론화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1999년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성매매 문제를 공부하며 기지촌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2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의 주한미군 K-6 기지 인근에 햇살복지회를 세웠다. 24일 오전 이곳에서 우 원장과 <오마이뉴스>가 만났다.
현재 햇살복지회 회원으로 등록한 기지촌 할머니들은 75명. 4분의3이 기초생활수급자로 매월 생계비 30만~35만 원씩 정부 보조를 받는다. 하지만 할머니 대부분이 세입자여서 월세를 내고 나면 10만~15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내야 한다.
우 원장은 "기지촌 할머니들의 노후를 위한 어떤 대책도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정화운동'을 펼치며 적극적으로 기지촌을 관리·감독했다"며 "(국가로부터) 할머니들은 '애국자'란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국가가 사실상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를 장려한 만큼, 기지촌 할머니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우 원장의 생각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번 달러는 경제성장의 밑거름"
'기지촌 정화사업'은 1969년 미국이 "앞으로 국제분쟁에 개입을 피하겠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자 정부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한미합동위원회 한국 측 간사로 1971년과 1972년 민·군관계분과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던 김기조 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는 "이 회의는 특히 기지촌 여성들의 대우와 형편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군이 철군을 강행하려 하자 청와대는 예산 1억 원짜리 '기지촌 정화사업'을 추진했다. 이 돈은 주로 기지촌 접대 여성들의 지위와 가옥 형편 등을 정화하는 데 쓰였다. 1970년 만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8121원(미화 82달러)에 불과했으니 당시 1억 원이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1년에 100불을 벌기 어려웠던 그 시절, 제일 많이 달러를 벌어들인 이들이 기지촌 여성이었다. 그들이 고생한 대가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국가와 사회, 민족이 기지촌 여성들의 희생을 보상해야 하지만, 실제로 아무 보상도, 보장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 김기조 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햇살사회복지회 개원 10주년 기념집에서.
우 원장은 "'기지촌 여성들이 다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정부 개입을 알려야 한다"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나라가 없을 때 일본 정부에게 끌려갔는데, 기지촌 할머니들은 우리나라 정부가 그런 일을 하도록 부추겼다"고 말했다. 우 원장은 "재미학자 캐서린 문은 <동맹 속의 섹스>란 책에서 '주한미군 기지촌의 성 산업이 한때 지역경제에 약 60%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기지촌 여성들도 많았다. 햇살복지회 회원들은 1960~70년대 안정리 기지촌 여성이 약 2500에서 3000명에 달했다고 증언했다. 누구나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별다른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이었다. 햇살복지회가 경기도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2008년 의정부, 동두천, 송탄, 평택, 파주지역 기지촌 할머니들의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143명 가운데 41명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지촌에 들어왔다'고 답했다. 먹고 잘 곳이 없거나(28명), 친구나 언니를 따라온 사람(41명)도 상당수였다.
"기지촌 여성 문제 한미동맹 속 문제로 풀어야"
하지만 기지촌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우 원장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가 있어 국민 정서가 일본에 비판적"이라며 "반면 미국에게는 호의적이어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풀어가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고, 할머니들의 노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햇살복지회는 '기지촌 여성인권연대'에 참여한다. 지난 2008년부터 두레방, 민변미군문제연구위원회,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단법인 에코젠더, 성매매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준비해온 일이다. 우 원장은 유영님 두레방 대표, 안김정애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대표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오는 31일 공식 출범하는 기지촌 여성인권연대는 미군 주둔으로 성매매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거듭되는 구조를 바꾸고, 인종·성별·계급 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길 꿈꾼다. 앞으로는 기지촌 여성들의 전면실태조사 실시와 지원 근거 마련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현재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우 원장은 "기지촌 '여성노인'이 아니라 '여성'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
"요즘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 상당수는 필리핀 출신이다. 국적만 바뀌었을 뿐, 가난 때문에 한국에 댄서로 들어와 암묵적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상황은 비슷하다. 성매매를 할 위험이 있는 아이들이 햇살복지회에 온 적이 있는데, 대부분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성매매도 결국 가난의 대물림이다. 그 구조의 고리를 끊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의 포주였다. 1960년대 한국은 돈이, 주한미군에겐 유흥시설이 필요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가난 때문에 (기지촌으로) 내몰렸다. '기지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며 폄하하고 낙인찍을 게 아니라 한미동맹 사이에서 일어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
▲ 2002년 경기도 평택에 햇살사회복지회를 설립해 기지촌 할머니들을 도와온 우순덕 원장. 우 원장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기지촌 정화사업' 등을 펼치며 사실상 성매매를 장려했다고 비판했다. | |
ⓒ 박소희 |
그는 1999년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성매매 문제를 공부하며 기지촌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2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의 주한미군 K-6 기지 인근에 햇살복지회를 세웠다. 24일 오전 이곳에서 우 원장과 <오마이뉴스>가 만났다.
현재 햇살복지회 회원으로 등록한 기지촌 할머니들은 75명. 4분의3이 기초생활수급자로 매월 생계비 30만~35만 원씩 정부 보조를 받는다. 하지만 할머니 대부분이 세입자여서 월세를 내고 나면 10만~15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내야 한다.
우 원장은 "기지촌 할머니들의 노후를 위한 어떤 대책도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정화운동'을 펼치며 적극적으로 기지촌을 관리·감독했다"며 "(국가로부터) 할머니들은 '애국자'란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국가가 사실상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를 장려한 만큼, 기지촌 할머니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우 원장의 생각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번 달러는 경제성장의 밑거름"
'기지촌 정화사업'은 1969년 미국이 "앞으로 국제분쟁에 개입을 피하겠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자 정부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한미합동위원회 한국 측 간사로 1971년과 1972년 민·군관계분과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던 김기조 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는 "이 회의는 특히 기지촌 여성들의 대우와 형편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군이 철군을 강행하려 하자 청와대는 예산 1억 원짜리 '기지촌 정화사업'을 추진했다. 이 돈은 주로 기지촌 접대 여성들의 지위와 가옥 형편 등을 정화하는 데 쓰였다. 1970년 만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8121원(미화 82달러)에 불과했으니 당시 1억 원이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 과거 기지촌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지역 보건소에서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안정리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 여성의 보건증이다. | |
ⓒ 햇살사회복지회 |
"1년에 100불을 벌기 어려웠던 그 시절, 제일 많이 달러를 벌어들인 이들이 기지촌 여성이었다. 그들이 고생한 대가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국가와 사회, 민족이 기지촌 여성들의 희생을 보상해야 하지만, 실제로 아무 보상도, 보장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 김기조 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햇살사회복지회 개원 10주년 기념집에서.
우 원장은 "'기지촌 여성들이 다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정부 개입을 알려야 한다"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나라가 없을 때 일본 정부에게 끌려갔는데, 기지촌 할머니들은 우리나라 정부가 그런 일을 하도록 부추겼다"고 말했다. 우 원장은 "재미학자 캐서린 문은 <동맹 속의 섹스>란 책에서 '주한미군 기지촌의 성 산업이 한때 지역경제에 약 60%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기지촌 여성들도 많았다. 햇살복지회 회원들은 1960~70년대 안정리 기지촌 여성이 약 2500에서 3000명에 달했다고 증언했다. 누구나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별다른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이었다. 햇살복지회가 경기도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2008년 의정부, 동두천, 송탄, 평택, 파주지역 기지촌 할머니들의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143명 가운데 41명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지촌에 들어왔다'고 답했다. 먹고 잘 곳이 없거나(28명), 친구나 언니를 따라온 사람(41명)도 상당수였다.
"기지촌 여성 문제 한미동맹 속 문제로 풀어야"
▲ 7월 10일 경기도 평택시 팽성국제교류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숙자이야기>의 한 장면. 기지촌 할머니들은 자신들의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이 작품에 직접 출연했다. | |
ⓒ 햇살사회복지회 |
하지만 기지촌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우 원장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가 있어 국민 정서가 일본에 비판적"이라며 "반면 미국에게는 호의적이어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풀어가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고, 할머니들의 노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햇살복지회는 '기지촌 여성인권연대'에 참여한다. 지난 2008년부터 두레방, 민변미군문제연구위원회,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단법인 에코젠더, 성매매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준비해온 일이다. 우 원장은 유영님 두레방 대표, 안김정애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대표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오는 31일 공식 출범하는 기지촌 여성인권연대는 미군 주둔으로 성매매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거듭되는 구조를 바꾸고, 인종·성별·계급 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길 꿈꾼다. 앞으로는 기지촌 여성들의 전면실태조사 실시와 지원 근거 마련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현재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우 원장은 "기지촌 '여성노인'이 아니라 '여성'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
"요즘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 상당수는 필리핀 출신이다. 국적만 바뀌었을 뿐, 가난 때문에 한국에 댄서로 들어와 암묵적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상황은 비슷하다. 성매매를 할 위험이 있는 아이들이 햇살복지회에 온 적이 있는데, 대부분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성매매도 결국 가난의 대물림이다. 그 구조의 고리를 끊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조경미논술CLASS[#논술언니] > 논구술면접&시사상식_Archi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30 VS 5060, 달라도 너무 다른 투표양상.... 간극 어떻게 메울까 (0) | 2012.12.20 |
---|---|
한국사회, 계층 갈등이 세대·지역 갈등보다 더 심각 (0) | 2012.12.17 |
월급 많은 여성이 둘째도 더 낳는다 (0) | 2012.12.17 |
[소수자와 인권] 보충자료 (0) | 2012.12.16 |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며 자살, 그런데도…" (0) | 201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