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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미논술CLASS[#논술언니]/논구술면접&시사상식_Archive

[논술언니 지식쿠키] 주제 19: 예술의 사회적 기능

안녕하세요

대치동 논술언니 조경미쌤입니다^^

 

 

 

 

올해는 우리 수험생들의
배경지식 확장에 도움을 드리고자
읽기자료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대신 너무 힘들지 않게,
논술과 면접에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쿠키’ 하나 먹듯이 가볍게 읽고,
꼭꼭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도록
알려드릴 거예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
당신들의 합격에 기여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해볼게요^^

 


 

씩 올라가는 입꼬리 좀 봐

그 웃음만 봐도 알아 분명히 너는 짓궂어

아아, 이름이 아주 예쁘구나

계속 부르고 싶어

말하지 못하는 나쁜 상상이 사랑스러워

 

조그만 손가락으로 소리를 만지네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색과

풍경을 노래 부르네 yeah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Climb up me

Climb up me

 

꽃을 피운 듯,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당장에 머리 위엔 햇살을 띄우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너의 속은

먹구름과 닿아있네 oh

 

아이유의 <Zeze>라는 노래가 한때 참 핫했어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아이유가 인터뷰에서 "zeze는 소설 속 라임오렌지나무인 밍기뉴의 관점에서 만들었고 제제는 순수하면서 어떤 부분에선 잔인하다. 캐릭터만 봤을 때 모순점을 많이 가진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있고 섹시하다고 느꼈다."라고 답했고요.

 


 

 

망사 스타킹을 신고, 반바지를 입고 핀업걸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에요. 어떤 사람은 바지를 벗겨놨다고도 보았고요, 근데 아무리봐도 바지 속에 스타킹을 신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이 그림도 논란이 좀 되었었어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출판사인 동녘에서는 이렇게 응답했고요.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 잎을 가져가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제제는 다섯 살짜리 아이로 가족에게서도 학대를 받고 상처로 가득한 아이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들어야만 하나요?"

라는 제제의 말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제제에게 밍기뉴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유일한 친구이구요. 그런데 밍기뉴 관점에서 만든 노래가 제제는 교활하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제제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구요. 그런 작가의 의도가 있는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다니요.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인 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제에다가 망사스타킹을 신기고 저 자세라뇨..

핀업걸은 굉장히 상업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정답 없는 논쟁이니까, 수험생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술이 사회적으로 규제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아니면 표현의 자유로서 존중받아야 할지.

 


우리는 수험생이니까, 문제도 하나 풀어봅시다.

두 제시문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찾아보세요.

 

() 매화 또한 초목의 일종이나 가장 그려내기 어렵다. 대개 그 가지와 줄기가 굴곡져 용과 뱀이 뒤엉킨 모습처럼 된 것은 매화의 참 모습이 아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왕성하고 향기롭게 흘러넘침이 마치 달빛이 밝게 비치고 눈발이 흩날리는 것 같음을 헤아려 깨닫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 매화의 참 모습이므로 가지나 잎의 처리는 논할 게 못 된다.
옛날에 내 친구 이자야(李子野)가 등불 아래 벽에 비치어 나타난 매화 그림자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 형상이 부은 듯 부풀어 오르고 울퉁불퉁한 모습이어서 매화인 줄 알지 못하겠으나, 풍기는 분위기만은 제법 옮겨내었으므로 매화가 범상치 않은 화훼임을 알았다. 내가 손뼉을 치면서 껄껄 웃자, 자야가 달가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소동파(蘇東坡)가 등불을 마주하고 말의 그림자를 그린 것보다 낫지 아니한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펼쳐내어 자연스런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겠다. 나는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매화의 운치[]를 어찌 알겠는가? 운치도 알지 못하거늘 매화의 본성[]을 어찌 알겠는가?”라 하였다.
본질적인 특성[]은 매화에 있는 것이지만 운치를 느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단순히 대상물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매화와 나는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서로 다르다. 그러나 상리(常理)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나와 매화는 같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줄만 알았지, 그 운치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온통 티끌과 먼지로 뒤덮인 세상에서 그 마음속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다면, 상쾌한 정신과 빼어난 맑음으로 충만한 매화에게서 나의 운치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운치를 이미 터득했다면 그것은 본질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이해에 도달한 자는 매화에 대해서 붓을 잡는 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바로 해 낼 수 있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가지와 잎을 따지겠는가?
(권헌權憲, 묵매기墨梅記)


() 소동파의 시에 그림을 그리되 겉모습만 같게 하면 된다고 하니, 이런 소견들은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시를 짓는 데 앞에 보이는 경치만 읊는 것도, 시의 본뜻을 알고 짓는 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화가들이 이 시를 종지(宗旨)로 삼고 진하지 않은 먹물로 그림을 거칠게 그리니, 이는 물체의 본질과 어긋나게 된 것이다.
지금 만약 그림을 그리되 겉모습은 같지 않게 해도 되고, 시를 짓되 앞에 보이는 경치를 읊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집에 동파가 그린 묵죽이 한 폭이 있는데, 가지와 잎이 모두 산 대나무와 꼭 같으니, 이것이 소위 틀림없는 사진(寫眞)이란 것이다.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게 되지 않는다면 정신을 제대로 전해낼 수 있겠는가?
동파가 이렇게 시를 읊은 것은 대개 겉모습은 비슷하게 되어도 정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비록 이 물체가 있다 할지라도 광채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도 말하기를 그림이란 정신이 나타나야 하는데, 겉모습부터 같지 않게 되었다면 어찌 같다 할 수 있겠으며 또 광채가 있어야 하는데 딴 물건처럼 되었다면 어찌 이 물건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한다.
(이익李翼, <논화형사論畵形似>, 성호사설星湖僿說5)

 

그리고 ()는 연세대에서도 한번 출제되었던 제시문인데요, 예술에 대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견해를 한번 파악해보세요. 그들은 그림을 창작하고 감상할 때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할까요?

 

제시문 (가)에서 밝히고 있는 권헌의 화론은 무릇 그림이란 사물의 본질(本質: 전신(傳神))을 그려내야 한다는 ‘전신론(傳神論)’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은 사물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그것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신론의 입장에서 볼 때 제대로 그린 매화의 그림은 눈발이 흩날리듯 하고 향기가 퍼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흩날림과 향기로운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매화에서 느끼는 정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흩날림과 향기로움은 붓의 자취를 통해서 표현될 것입니다. 따라서 붓의 자취를 통해서 매화의 본질을 표현한 그림은 실제 매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에요. 실제로 전통적인 동양화는 실제 사물을 그대로 묘사했는지 여부로 평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마치 붓글씨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붓놀림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나 힘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제시문 (가)는 바로 이러한 동양의 전통적인 미적 가치에 입각해서 전개된 화론을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전신론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수험생이라면 전신론이라는 용어를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제시문 (가)에 나타난 화론이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파악해 두면 좋겠습니다.

 

반면에 제시문 (나)에서 밝히고 있는 이익의 화론은 실제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실론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게 되지 않는다면 정신을 제대로 전해 낼 수 있겠는가?”라는 부분은 실제의 모습을 무시하고 정신만을 강조하고 있는 전신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동양 회화관은 기운과 생동을 강조하는 기운생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전신론을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온 개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전신론의 입장에서만 기운생동의 개념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요. 기운생동이란 다름 아닌 그림의 활기를 말하는데, 그러한 그림의 활기란 사물을 실제와 같이 생동감 있게 묘사할 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 사물만큼이나 생동감 있는 그림이야말로 기운생동을 실현한 그림이 됩니다. 이처럼 이익은 실제 사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익이 실제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긍정하고 있지만, 단순히 그 외양만 똑같이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화가의 정신이 묻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익의 입장은 사실론에 가깝지만 작가의 정신을 중시하는 전신론의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